반짝반짝 빛나는 -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옮김, 소담출판사
한때 에쿠니 가오리의 팬이었던 나는 그녀가 쓴 책들을 모았었다.
이제는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잘 읽지 않는 게 미안해서 새 주인을 만나게 해 주었다.
구매자를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책을 다시 읽고 느낀 점을 써보았다.
주의!!: 주요 줄거리(결말 포함)가 적혀 있습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내는 룸메이트 같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동성애인을 사랑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삼각 관계를 그린 소설. |
주요 등장인물
쇼코 - 아내, 이탈리아어 초보 번역가
무츠키 - 남편, 의사
곤 - 무츠키의 동성애인, 대학생
쇼코의 부모님 - 의사 남편 만났다고 좋아하심. 얼른 애를 갖기를 바람
무츠키의 부모님 - 시모는 동성애자인 아들과 결혼한 쇼코가 그 사실을 알고 떠날까 봐 걱정하심. 인공수정으로 애를 갖길 바람. 단, 시부는 모든 사실을 알고서 결혼을 끝까지 반대함.
미즈호 - 쇼코의 친구
하네기 - 쇼코의 전 남자친구
굳건하면서도 위태로운 삼각관계
쇼코는 친구처럼 다정다감한 무츠키를 사랑하고, 무츠키가 동성애자임을 알고도 결혼한다.
스스로를 알코올 중독자라고 여기므로 중독자인 자신과 동성애자인 무츠키가 부부로 만나기에 꽤나 그럴싸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쇼코는 남편에 대해 "자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의문을 품는다. 남편이 정말 자상한 걸까?
쇼코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애초에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질 수도,
그렇다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며 알콜에 점점 의존하고, 남편에 대해서도 야속함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쇼코는 남편과 곤의 관계도 인정하기에 그들 사이의 성관계를 표현하는데 거침없다.
곤과도 편한 친구처럼 지낸다. 오죽하면 곤을 집에 초대해서, 안방엔 남편과 곤이 머무르는 게 맞다고 말할 정도일까.
그런 상황을 어색해 못 견디는 남편과, 그럼 다 함께 거실 바닥에서 누워 자자고 말하는 곤,
이를 상황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쇼코. 이 삼각관계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이 셋의 관계는 실금이 잔뜩 간 유리잔 같다.
분위기는 무츠키를 사랑하는 마음에 절망하며 점점 술에 의존해 가며 쇼코와, '보통의 부부'라는 타이틀을 포기하지 못하며 쇼코가 주는 안락한 집안 내조(잘 다려진 침대커버 같은)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쇼코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는 무츠키 때문에 갈등 상황으로 점차 치닫는다. 무츠키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이 감정은 우정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보다 연약해서 지켜줘야 할 상대에 대한 동정심도 포함돼 있다.
문제는 무츠키가 점점 더 안쓰럽고 위태롭게 바뀌어가는 쇼코를 도와줄 방법으로 자신처럼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길 바란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평범한 다른 남자가 아닌, 쇼코가 예전에 만났다가 헤어진 전 남친을 쇼코의 친구를 통해서 데이트를 하도록 상황을 짜는 악수를 둔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들 부부를 극적인 갈등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다가 쇼코가 쓰러져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사이 무츠키가 그녀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서로를 위해준다며 한 행동의 결과가 상대를 더 힘들게 했다는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두 사람. 이들 사이의 믿음은 이 사건을 통해서 더욱 단단해진다.
부모님과 친구 -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편견
한 차례 고비를 넘기며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을 깨닫고 이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켜가는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시련이 닥친다. 바로 '결혼하면 아이는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편견. 쇼코의 부모님은 딸의 사윗감이 '의사'라는 타이틀에 손뼉 치며 딸을 시집보냈고, 무츠키의 어머니는 동성애자인 아들의 성적 취향을 며느리가 알게 될까 봐 걱정하면서도, 둘의 결혼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 부모님에게서 사회에서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어디 내보여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적이면서 가식적이지만 어디선가 평범하게 볼 법한 부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쇼코와 무츠키는 양가 부모님에게 서로가 지닌 약점을 다 밝히지 않았지만, 결국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전에 쇼코의 짝을 찾아주려 쇼코의 친구를 이용했던 악수를 통해서 말이다. 쇼코 친구인 미즈호에게 무츠키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털어놓고, 미즈호가 그 사실을 쇼코 부모님에게 전한다.
내보일 좋은 사윗감을 맞았다고 기뻐했던 장인장모에게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이었으리라. 양가 부모님과 쇼코와 무츠키가 모두 모인 자리, 장인장모는 동성애자인 무츠키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그리고 시어머니는 쇼코의 알콜중독에 대해서 서로 따져 물으며, 상대방을 힐난하기 바쁘고, 책임을 떠 넘기려 애쓴다.
알콜 중독자 아내와 동성애자 남편 부부를 놓고 양가 부모님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하는 건 쉽다. 너무 클리셰적이다. 이 소설이 2000년대 초반에 쓰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충분히 짐작할만한 클리셰다. 요즘에야 가슴으로 슬픔을 묻고 세상의 힐난을 향해서 당당하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며 말할 용기 있는 부모가 한둘쯤 있겠다마는, 2000년대 초반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
끔찍하도록 긴 하루였다. 어머니의 가시 돋친 목소리와 장인의 험악한 표정, 눈물짓는 장모의 손수건 모양과 고개 숙인 아버지의 옆얼굴. - p. 169
쇼코가 사랑을 지키고 표현하는 아주 용감한 방법
사실 쇼코에게 양가 부모님의 채근과 닦달을 무조건 무시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기 힘든 상태면 인공수정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시모의 말에, 쇼코는 혼자서 굳건히 이겨내기는 커녕 술에 의존하는 일이 더 심해졌었기 때문이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겪고(자신의 선택을 존중받기는 커녕, 자기 부모님에게 조르르 달려가 딸이 동성애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고자질했다), 누구보다도 자기편이어야 할 부모님도 자신에게 이겨내기 힘든 힐난의 목소리를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걸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쇼코는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쇼코는 한 가지 묘수를 둔다. 부모님께 무츠키가 애인과 헤어졌다 말하며 안심시켜 드리고, 부모님의 단어인 '상식적인' 수단으로, 즉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겠다 말씀드린 것이다. 부모님은 당연히 좋아하신다. 헤어졌다는 딸의 말에 기대 반, 의심 반 눈초리를 보내다가, 딸의 확실한 거짓말에 '스무 살 처녀처럼 웃는' 엄마. 이 부분도 상당히 클리셰적이다. 부여받은 캐릭터대로 착실하게 움직이는 쇼코네 엄마다.
그리고서 무츠키는 쇼코에게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을 듣지만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사실 무츠키는 처음에는 쇼코를 가만히 둠으로써 그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알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 남자 친구와 쇼코를 이어주려 했다가 쇼코에게 불같은 역풍을 맞았었다. 이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츠키는 쇼코가 사실은 얼마나 강인한 여성인지 아직까지도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사랑을 지켜주려 애쓰고, 그 보호 방법으로 무엇을 택하려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밝혀진 그녀의 진심에 무츠키와 곤 모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놀란다.
"쇼코 씨의 생각은, 그러니까, 말하기 어려운데 그, 무츠키의 정자와 곤의 정자를, 미리 시험관에서 섞어서 수정할 수 있느냐는 거였어. 그렇게 하면, 그러니까, 그, 모두의 아이가 될 수 있을 거라면서."
아연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한 1분 정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p.196
이 사실을 들은 곤은 그 길로 여행을 떠난다며 홀연히 사라진다. 며칠 후 기분이 한결 좋아 보이는 쇼코가 밝은 아침에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무츠키를 깨운다. 그리고 파티할 거니까 아래층인 202호에 잘 차려입고 오라는 말을 전한다. 그녀의 말대로 트위드 양복까지 차려입고 아랫집으로 향한 무츠키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한다. 머리에 빨간 리본을 매단 곤이다. "선물이야"라며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 쇼코. 쇼코가 이 모든 상황을 준비했다고 한다.
쇼코가 원한 삶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으면서 세 사람의 사랑을 지키는 삶이다.
"무사히 돌아온 곤 씨와, 우리 세 사람의 1주년을 위하여."
쇼코가 말하고,
"이제야 간신히 독립한 부부 두 사람을 위하여."
라고 곤이 말했다.
...
이게 무슨 곡이었더라. 멜로디만 들어도 눈물이 주르륵 흐를 듯한 곡.
"<She's Got a Way>지? 이 곳."
나의 기분을 꿰뚫어 보는 듯 곤이 말했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 p.203
남편의 애인을 선물이라고 준비했다는 아내 쇼코. 정말이지 충격적인 결말인 동시에 감동적이기도 했다. 무츠키를 얼마나 사랑하면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무츠키가 듣는 노래 제목인 "She's Got a Way"이다. 이 노래 제목이 쇼코의 선택을 단번에 보여주는 것 같다.
나라면 그녀처럼 용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접한 지는 정말 오래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뭐 이런 엿 같은 결말이 다 있나, 어떻게 세 사람이 아무 일도 없단 듯이 공평하게 잘 지내지? 란 의문도 들었다. 중간에 쇼코를 위해서 한번 자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곤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오손도손 그들만의 성벽을 세운 채 잘 산다고? 불륜에, 영원히 날 여자로 사랑해주지 않는 남편을 받아들이며? 이 무슨 변태스러운 결말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줄거리의 내용이라면 한국문화에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을 거란 편견도 있었다.
아무튼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줄거리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점이 되고서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는데, 과거에 비해 느낀 점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다. 일단 과거 내 생각은 소설 속에서 편견에 사로잡힌 쇼코의 친구나 부모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식이 없어서 부모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우리도 가끔 타인에게 도움이 된답시고 내 생각을 늘어놓거나 푸시하거나 하지 않나. 그게 마치 정답인 것처럼. 난 맞고 넌 틀렸어의 이분법적 태도로 상대방을 쉽게 가르치려 들진 않는가.
살아오면서 배운 것이지만 상대방이 살인이나 뺑소니 등과 같은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대개 상대방의 선택은 상대방에게 옳다. 선택 자체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건 살면서 타인과 부딪치며 깨닫기도, 또 누군가의 무례한 언행에 나 또한 상처받으며 깨우친 사실이기도 하다. 각자의 삶엔 각자가 세운 정답만 있을 뿐이다.(물론 그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무해할 경우만 해당된다.)
쇼코는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리고 양가 부모님의 압력을 받으며 처음에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무츠키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사랑까지 지키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자신만의 방벽을 세우고 그 성 안에 무츠키와 곤을 들인 것이다.(이는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던 양가 부모님과 친구에게 남모를 빅엿을 선사하는 근사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내게 과연 쇼코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느 정도까지 상대방의 마음을 허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실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다. 매우 어려운 일일테다. 거의 성자, 성녀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닐까. (아니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조차 편견이다. 누군가에겐 쉬운 선택일 수 있다.) 자기 사랑을 지키고자 상대방의 사랑도 지키는 쇼코는 굉장히 강인한 여성이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은 까만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일테다. 완벽히 같은 상황을 겪고 싶진 않더라도 그녀의 사랑을 지키려는 강한 마음만은 본받고 싶다.
훨씬, 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 소설
"어떤 사람이야? 신랑."
"자상한 사람."
그렇게 대답하고서 끔찍하도록 기분이 우울해졌다. 자상한 사람이라니, 그렇게 한 마디로 가볍게 단정 짓는 듯한 말투,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무츠키는 훨씬 더. 나는 난감했다. 훨씬, 의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 p.113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을 잘 나타내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한 마디로 축약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어서. 몇 마디 언어로 충분히 표현되기에 벅찬 사람이 있다.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쇼코의 심리와 무츠키의 심리선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이들의 심리대로 독자가 따라가도록 이끈다.
특히 쉼표(,)를 많이 쓰는데, 쉼표가 일러주는 대로 따라서 찬찬히 쉬며 읽어가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몰입하여 이야기가 진행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에서는 쇼코가 내놓은 기발한 해결책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가도 그녀를 응원하게 되는 묘한 모순점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훨씬 더...'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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